# 지난 4월 영화 ‘어벤져스2’ 개봉을 이틀 앞둔 명동 거리. 대형 특수 제작 차량 두 대가 거리 한복판에 서더니 컨테이너 화물칸 천장 부분이 위로 들려 올라간다. 모습을 드러낸 건 3.3m 크기의 헐크버스터. 헐크버스터는 영화에서 아이언맨을 만든 등장인물 토니 스타크가, 아군으로 나오는 등장인물 헐크가 이성을 잃을 때를 대비해 새로 고안한 초대형 로봇이다. 실물 크기의 로봇 피규어(모형)가 위용을 자랑하자 명동 일대는 일순간 교통마비가 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헐크버스터 피규어는 전 세계 5개밖에 없는 한정판 모델로 개당 가격은 5000만원을 웃돈다.롯데백화점과 함께 행사를 기획한 마블 피규어 공식수입사 플러컬렉스(www.flur collex.com)의 성혁진 대표는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 90% 이상이 어른들이다. 전시된 한정판 아이언맨 피규어의 경우 가격이 수십만원에서 100만원이 넘는 모델도 있는데 현장에서 바로 구매하는 고객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했다. # 첨단 유행의 거리, 서울 압구정 로데오거리. 2차선 도로 옆길을 걷다 보면 명품 시계숍, 고급 레스토랑 사이에 이색 건물이 눈길을 끈다. 사람 크기의 배트맨과 아이언맨 피규어가 마주보고 있는 테라스에서 실제 사람들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피규어뮤지엄W 모습이다. 들어가 보니 어릴 적 만화영화, 공상과학영화에서 봤던 영화 소품이며 의상, 캐릭터 상품, 엽서 등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약 2억여원에 달한다는 건담 모형 앞에선 입이 벌어진다. 6개 층 건물에 1000여점이 전시돼 있다는 이곳 역시 주 방문자는 20대 이상 성인이다. 키덜트 산업이 뜨고 있다. 키덜트란 어린이와 어른의 합성어, 즉 동심을 잃지 않은 어른을 의미한다. 어린 시절 즐겨 갖고 놀았던 장난감을 성인이 돼서도 수집하는가 하면, 동호회를 만들어 한정판 제품을 거래하는 등 그들만의 시장을 조성하기도 한다. 지난해 6월에는 한국맥도날드가 해피밀 제품을 구매한 고객에게 한정판 슈퍼마리오 완구를 선사하는 ‘해피밀 슈퍼마리오 세트’ 이벤트를 열었는데 어른들이 수십 m씩 줄을 서 일명 ‘해피밀 대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장 서울 동대문역사문화공원 근처만 거닐어 봐도 키덜트 시장은 일상생활 깊숙이 들어온 듯하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내 안경점은 고객 발길을 사로잡기 위해 아이언맨 캐릭터 피규어를 전시해놨는데 반응이 좋자 아예 안경점 한편에 캐릭터 상품 판매 코너를 따로 마련했다. 건너편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다 보면 SNS 카카오톡에서 이모티콘으로 익숙한 ‘마조앤새디’ 캐릭터카페가 불을 밝히고 있다. 가게 안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20대 이상 청춘남녀들이 차를 마시며 여가를 즐기는 모습이다. 마조앤새디는 ‘마린블루스’로 유명한 정철연 작가의 웹툰에 나오는 캐릭터로 2013년엔 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인형, 잡화 등을 백화점 매장에서 판매했는가 하면 지난해부터는 캐릭터 기반 카페도 출시, 4월 말 기준 4호점까지 문을 연 상황이다. 구매력·다양성 존중 문화 정착 덕분 키덜트 전시회·박물관도 인산인해 온라인쇼핑몰에서도 키덜트 제품은 아예 별도 코너가 마련돼 있을 정도로 대접받는다. 최근 옥션이 한 달(3월 25일~4월 26일)간 키덜트 대표 상품 매출액 성장률 추이를 분석해 봤더니 RC(무선조종차, 비행기류)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142%, 모형(프라모델) 146%, 건담 79%, 피규어 43% 등 대부분 두 자릿수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SK플래닛 11번가도 최근 일주일간(4월 21~27일) 영화 ‘어벤져스’ 관련 캐릭터 상품 매출이 전달 대비 180% 급증했다고 밝혔다. 쿠팡, 위메프 역시 관련 제품 3~4월 판매량이 전년 대비 70% 이상씩 성장했다. 특히 쿠팡에서는 169만원짜리 드론 3대가 팔리기도 했다. 저렴한 제품을 다루는 소셜커머스 업계에서 이례적이다. 전시회 역시 성황이다. 국내 최대 레고 커뮤니티 연합 창작 전시회인 ‘브릭코리아 컨벤션’에는 가족과 연인 등 총 5만명의 관객들이 찾았는가 하면 올해 초 열린 ‘2015 키덜트 엑스포’에도 120개 업체가 참가한 가운데 약 4만명이 다녀갔다. 상설전시관 개념인 박물관도 전국 곳곳에서 밀려드는 손님 덕에 휘파람을 분다. 국내 최대 규모 장난감 박물관 토이키노는 관람료만으로 수익을 내면서 확장 이전했고 국내 최초 레고 전문 박물관 마이뮤지엄 역시 성인들로 인산인해다. 키덜트 산업이 이처럼 자리 잡는 배경에 대해 권동현 경기대 서울캠퍼스 애니메이션영상학과 교수는 “구매력과 다양성 존중 문화 정착 덕분”이라고 정리한다. “어린 시절 로보트 태권V, 건담 등을 보고 자란 세대가 이제 경제력을 갖춘 20~40대가 되면서 향수에 그치지 않고 관련 상품을 적극 소비하는 주체가 됐다. 또 사무실에 피규어를 갖다놓으면 ‘오타쿠(폐쇄적인 1인 향유형 문화 소비 유형)’로 치부되며 눈칫밥을 먹던 10년 전에 비해 이를 개성으로 존중받을 만큼 개방성이 높아진 사회 분위기 역시 키덜트 산업 성장 배경이다.” 성인들의 키덜트 시장에 대한 호감도는 꽤 높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95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키덜트 문화에 긍정적’이라는 답변이 80%, ‘나는 키덜트족이다’라는 답변이 약 30%를 차지할 정도다. 플랫폼의 다양화도 키덜트 산업 확산에 불을 지폈다. 예전엔 TV 만화 정도로 치부됐던 애니메이션, 캐릭터 콘텐츠가 이제는 네이버, 다음 등 온라인 포털사이트는 물론 SNS, 모바일 등 다채로운 플랫폼을 통해 유통되면서 그만큼 이를 즐기는 연령대 역시 다양해졌다는 분석이다. 마조앤새디 제작사 마조웍스의 서무경 담당자는 “인터넷 보급 초창기였던 1990년대 후반에는 이메일 카드 내 캐릭터를 삽입하는 서비스가 인기를 끌며 캐릭터 시장이 열렸지만 인형, 문구 등 한정된 영역에 그쳤다. 하지만 지금은 모바일 웹툰이란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캐릭터들이 다량으로 쏟아지고 있고 음료, 빵, 패션 등 다양한 공산품과의 접목은 물론 카페, 백화점 등 경제활동인구의 소비문화 속으로도 침투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했다. 성인들이 각박한 현실을 위로받는 데 이들 제품을 활용한다는 의견도 있다. 어벤져스 완구를 국내에서 유통하고 있는 해즈브로코리아 관계자는 “갈수록 심해지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치유받고자 하는 현대인의 욕구가 어린 시절 좋았던 기억에 대한 향수로 이어져 그 기억들을 다시 되살리기 위한 소비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관련 업계에서는 키덜트 시장이 완구, 패션, 잡화, 장난감, 문구, 전시 등의 산업과 손을 맞잡으며 지난해 5000억원대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 더불어 매년 성장을 거쳐 2~3년 내 1조원 규모가 될 것이란 전망도 조심스레 제기된다. 키덜트 시장이 이미 발달돼 있는 일본의 경우 약 6조원, 미국은 약 12조~15조원으로 추정되는데 국내 시장 역시 3040 싱글족의 증가, 자기만족을 위한 소비문화 확산 등으로 선진국 시장 흐름을 따라갈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유통업계가 이를 놓칠 리 없다. 롯데백화점은 지난해부터 키덜트 전문매장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올해 5월엔 본점 영플라자와 부산본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유일한 공식 미니카 대회인 ‘타미야 미니카(TAMIA Mini 4WD) 경진대회’의 한국 대표 선발전을 진행하기도 했다. 물론 참가자 대부분은 어른들이었다. 캐릭터 업체들 역시 발 빠르게 유행을 선도하려 한다. ‘라바’로 유명한 김광용 투바엔 대표는 “키덜트 산업 하면 피규어, 장난감 등의 완구류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패션, 화장품, 생활소품 등 본격적인 라이프 스타일 산업으로 진화할 것으로 내다보고 다양한 분야의 업체들과 협업을 꾀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혁진 대표도 “홍콩 피규어 전문업체 ‘HOTTOYS’가 어벤져스 등 디즈니 캐릭터 이외에도 다양한 라이선스를 확보해 한정판 피규어를 제작하는 회사인 만큼 공식 수입사로 더욱 다양한 캐릭터 제품들을 들여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국내 키덜트 산업이 성장세라지만 보완할 점도 적잖다. 우선 소비되는 주요 콘텐츠 대부분이 외제, 즉 해외 캐릭터 위주다. 양유정 피규어뮤지엄W 관장은 “상품 개발 시 값비싼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하거나, 아예 상품을 수입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 키덜트 산업은 소비형 산업이라는 한계가 있다. 키덜트 산업이 성공적으로 국내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늦었지만 국내 창작의 상품성 높은 캐릭터가 계속 나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권동현 교수는 “캐릭터 파워가 상품 구매력으로 연결되는데 국내 콘텐츠는 유아용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웹툰 ‘미생’ 같은 성인용 콘텐츠가 가능성을 보이긴 했지만 연관 상품 출시로 활발하게 이어지지 못한 건 가상세계, 즉 판타지물이 아니다 보니 제품화에 한계를 보여서다. 영세 업체들이 창작력만 갖고 승부하던 때는 지났다. 지금부터는 상품화를 염두에 둔 캐릭터 기획, 유통 역량을 갖춘 업체들의 등장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박수호 기자 suhoz@mk.co.kr]